中卒의 20년 사채업자 출신 - 세종증권 회장 金亨珍의 돈 哲學
崔普植 기자의 직격 인터뷰] 中卒 학력의 세종증권 회장 金亨珍의 돈 생리학 (1/5)
中卒의 20년 사채업자 출신 - 세종증권 회장 金亨珍의 돈 哲學
『돈 버는게 가장 쉽다. 많이 잃어보고 많이 빌려본 사람이 돈 번다』
아버지는 날품팔이, 어머니는 음독 자살,
가난을 헤치고 上京한 소년의 七顚八起 人生
월간 조선/2000년. 2월호/崔普植 朝鮮日報 경제부 기자 congchi@chosun.com
승부사
<세종증권 金亨珍(김형진) 회장은 현대증권
이익치 회장과 중앙종금 김석기 회장과 함께 증권계에서 「트리오 황태자」라 불린다. IMF 위기를 기회로 삼아 공격적인 투자방식이 성공했다. 이익치 회장은 업계 5위인 현대증권을 1위 까지 끌어올렸으나 주가조작혐의로 구속됐 고, 김석기 회장은 작년 3월 적자 상태인 중앙綜金(종금)을 인수해 석 달 만에 1천1 백억원의 흑자를 기록했으나 외화밀반출혐 의로 구속됐다. 김형진 회장은 동아증권을 인수해 「세종증권」으로 바꾼 뒤 당시로 는 이름조차 생소한 사이버거래를 주요 영 업방식으로 채택해 증권업계를 놀라게했다 . 하지만 그 역시 증권거래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때때로 검찰은 無明(무명) 속에 있던 인물 을 조명의 무대로 끌어들이는 보조역할을 맡는 수가 있다. 세종증권 金亨珍 회장(42 )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金회장은 혹 명동 의 사채시장이나 증권가라면 몰라도, 세간 에서는 듣지 못한 이름이었다. 검찰이 그를 구속하자 비로소 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작년 8월6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해설기사는 다음과 같다.
<맨손으로 시작해 5천억원대의 재산을 일궈 낸 그는 명동 사채시장이 배출한 立志傳(입 지전)적 인물로 꼽힌다.
전남 장흥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上京(상경 )한 그는 법무사 사무소 사환, 등기소 공무 원 등을 거치며 「채권」을 익혔다. 23세 때인 1981년 군복무를 마치고 명동에 사채 사무실을 내면서 큰돈을 만지기 시작했다. 金씨에게 찾아온 최대의 기회는 IMF사태. 회사채 금리가 30% 이상으로 치솟으면서 그 의 장사 수완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당 시는 금융시장에 극도의 불신감이 퍼져 자 유로울 수 없던 때. 金씨는 금융기관들이 외면하는 중견기업들에게 접근, 기업이 발 행한 회사채를 높은 금리 조건으로 사들인 뒤 자신의 몫을 챙기고 투자신탁사 등 제 2금융권에 되파는 방법으로 큰돈을 벌었다. 검찰에 따르면 그가 이렇게 해서 IMF체제 초기에 번 돈이 무려 5백30억원. 기업들이 발행한 1조7천억원어치의 회사채가 그의 손을 거쳐 제2금융권으로 유입됐다. 金씨는 이때 번 돈을 종자돈으로 삼아 지난 해 7월 부도 위기에 몰린 동아증권 주식을 주당 1천3백원씩 2백10만 주를 사모아 경 영권을 확보했다>
그뒤로 金회장은 어디에 있을까. 여전히 囹圄(영어)의 몸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서울 다동에 있는 세종증권 회장실에서 정상업 무를 하고 있는 그를 만날 수 있다. 당시 72일간 수감생활을 한 뒤 그는 保釋(보석) 으로 풀려났다.
그가 회사채를 불법거래해 번 5백여억원의 수익은 몰수되거나 추징되지 않았을까. 그 렇지도 않다. 증권거래법에는 회사債(채)의 불법거래로 얻은 수익 등에 관한 몰수 추 징 등의 규정이 없다. 형법상의 일반적인 몰수 추징 규정으로도 이를 적용할 수 없다 . 형법상 몰수 추징은 범죄행위로 얻은 이 익을 대상으로 하는데, 그가 챙긴 이익은 도둑이 훔친 물건이나 뇌물처럼 범죄행위로 직접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수 익은 안전했다.
더욱이 채권 거래 과정에서 탈세를 했을 경 우 세금으로 일부 추징할 수 있지만 그는 세금을 꼬박꼬박 다 낸 것으로 밝혀졌다. 자신에게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가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는 걸 본 뒤로, 세무당국에 자진신고해 뒤탈이 없도록 세금을 냈다고 한다.
항소심 법정은 그에게 4천5백만원의 벌금형 만 선고했다. 「무허가 영업(채권거래)은 위법이지만 IMF라는 상황에서 (채권거래가 ) 기업의 숨통을 열어주는 등 경제회복에 도움을 준 점 등을 감안했다」는 게 판결 요지였다.
『돈 잃어본 사람이 돈 번다』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金회장은 키작 고 목소리는 단단했다. 기자가 그에게 처음 본 것은 만년과장 같은 모습이었다. Y셔츠 칼라깃까지 다림질해 각세웠지만 오히려 허름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中卒(중졸)과 명동 사채업자 출신으로 돈많이 벌었다는 점을 빼면 그는 아무런 자기 증명을 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기자가 『명동의 「큰손」은 어떤 사람들인 가』라며 그를 명동의 사채업자 테두리로 여전히 가두려고 했을 때, 그는 단호했다. 『나는 채권 거래를 했지, 돈 빌려주고 高利(고리)를 받는 어음업자는 아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온 것이다.
『그들은 큰돈을 가졌지만, 저는 그들을 「 거지」로 봅니다. 자금을 마음대로 파이낸 싱(금융거래)하는 게 큰손이지, 돈만 있다 고 큰손이 아닙니다.
돈이란 남의 돈이 됐든 제돈이 됐든, 돈을 갖고 경험한 사람의 것이지 돈을 갖고 있 는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돈과 관련된 능 력은 돈을 많이 갖고 있고 남에게 돈을 빌 려주는 쪽에 있는 게 아니라, 그걸 빌려쓴 사람에게 커집니다. 돈을 갖고 있는 사람 은 그냥 관리하는 능력은 커질지 모르나, 생산능력은 커질 수가 없죠. 돈을 많이 잃 어본 사람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능력도 생겨요.
저도 큰손에게 돈을 빌린 적은 있어요. 하 지만 그들에게 돈을 빌리면 큰일을 못해요 . 빌려준 걸로 계속 간섭하고 구속해요. 저 는 그들에게 10억원을 빌리면 제도권 금융 에서 1천억원을 창출하는 「프로젝트 파이 낸싱」을 했어요. 이들처럼 지금껏 번 돈으 로 이자놀이를 하거나 임대업을 해도 평생 여유롭게 살아갈 수도 있어요. 하지만 사 회 속에서 자기 철학의 마켓 쉐어(시장 점 유율)를 추구해보지 않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는 기자보다 두 살 年上(연상)이다. 동시 대의 경험을 공유해왔다고 할 수 있다. 기 자의 과거 시절에도 최종학력 「中卒」은 매우 드문 경우였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인생의 출발선에서 남들과 함께 줄설 기회 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던 셈이다. 그럼에 도 그는 증권회사 회장으로서 금융그룹을 꿈꾸고 있다. 단도직입으로 『당신은 어떻 게 큰돈을 벌고 증권회사 회장이 될 수 있 었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명동의 사채시 장을 예로 들었다.
『명동에서 「어음」으로 돈놀이하던 사람 은 어음으로 망하고, 채권 장사하던 사람은 채권으로 망했어요. 변신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망했어요. 나는 한번 성공했던 금융 상품에 고집 않고 다른 금융상품으로 바꿔 나갔어요. 국공채, 회사채, 양도성예금증서 (CD), 전환사채(CB)로 경제 흐름을 타고 바 꿔나갔어요. 자기가 해오던 방식대로 계속 하면 그걸로 망하게 되어 있어요. 과거에는 논 1백 마지기만 있으면 갑부 행세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우습죠. 시대 흐 름을 읽고 논마지기를 팔아 공장을 짓는다 거나 다른 것을 했다면 달라졌을 겁니다. 어떤 것에 구속되면 그걸로 망해요』
『작은 돈은 좇아가면 벌 수 있다』
그러면서 기자를 응시하며 『신문기자로 구 속되면 그걸로 망해요. 현재의 기자 인생관 에서 미래의 기자 인생관으로 바뀌어야 해 요』라고 덧붙였다. 그는 미래의 기자 인생 관이 어떠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세상이 변해도 변해서는 안되는 가치가 있지 않는가요.
『물론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농사도 그렇지요. 누군가는 그걸 떠맡고 있어야 해요. 그분들은 「세상에 쌀이 없으면 살 수 있는가」라고들 해요. 맞는 말씀이지요. 하지만 세상 흐름은 농사가 아니지요. 위 선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아요. 현실에서 과 연 농사를 짓는 이들이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까』
─돈이 절박했던 가난한 시절과 지금을 비 교하면 어떤가요.
『지금은 돈이 없다고 봐요. 종이쪽지(주식 )로 되어 있으니까요. 제가 경영을 잘하면 종이쪽지가 다이아몬드가 될 것이고 그렇 지 않으면 휴지가 되겠지요. 아마 주식은 제 인생의 가치를 재는 성적표가 될 겁니다 . 이제는 돈 때문에 사는 게 아닙니다. 어 느 사채업자는 빌딩 하나 사놓은뒤, 다방 여종업원과 바람피고 다녔어요. 저는 돈버 는 실력으로 사회에 뭔가를 남길 겁니다』 기자가 『사람에게서 돈은 무엇일까요』라 는 질문을 하자, 그는 핀트가 약간 어긋나 는 듯한 답변을 했다.
『사람에게 人格(인격)이 있듯이 돈에도 「 돈격」이 있어요. 사람 관계에서 類類相從 (유유상종)이 있듯이, 돈도 자기를 어떻게 생각해주느냐에 따라가요. 돈을 절약하고 아낄 줄 아는 이에게 돈은 모입니다. 하지 만 그건 작은 돈의 경우입니다. 큰돈은 쓸 줄 알고 투자할 줄 알아야 들어옵니다. 작 은 돈은 좇아가면 벌 수 있지만, 큰 돈은 좇는다고 들어오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누가 돈벌었다면 꼭 찾아가 만났 어요.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지 부럽 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 방법을 배우기 위 해서였죠. 세월이 지나니까, 경제를 알면 돈은 그냥 벌린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론 적으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물도 중요 해요. 금리나 실물경기, 국제경기, 환율, 금융상품 등에 대해 제대로 정보를 입수하 고 있다면 돈버는 게 어렵지 않아요』 그러면서 그는 『순식간에 제가 큰 돈을 번 것은 아니지요. 돈번 과정을 간단하게 설 명하기 어렵고, 고통 안 받고 쉽게 번 것처 럼 보이지만, 하루하루 金利(금리)가 오르 고 내릴 때마다 몸 속의 피가 쫙쫙 멎어요 . 즐거움이 큰 만큼 고통이 커요. 즐거우면 흥분을 조절하면 되지만, 고통이란 피할 방법이 없어요』라고 덧붙였다.
─돈버는 고통이 있었다면 이제 즐기는 樂 (낙)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개인을 위해 돈을 써본 기억이 별로 없어요. 그저 돈버는 일 자체를 재미있어 할 뿐이지요. 돈을 써서 즐기는 이도 있고 돈을 버는 걸로 즐기는 이도 있겠지요. 그 렇다고 수전노는 아닙니다. 제가 성공하자 손벌리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사정이 딱 한 사람을 돕는 걸 한번도 망설인 적 없어 요. 항상 어려웠던 과거를 잊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게을러서 가난한 사람에게는 절대 도와주지 않아요. 또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도 돌보지 않아요』
이력서
그의 집안은 찢어질 듯 가난했다고 한다. 부친이 일곱 살 때 祖父(조부)가 돌아가셨 다. 물려받은 재산은 큰아버지가 癩病(나병)을 앓는 바람에 다 날려버렸다. 부친에게 돌아온 논 세 마지기는 형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털어먹었다.
논밭이 없는 농촌 가정에서 그는 4남1녀 중 3남이었다. 가난에 찌든 집안에는 늘 불화 가 끊이질 않았다. 모친은 그가 중학교 2학 년 때 음독 자살한다. 그뒤로 집안은 풍비 박산이 났다. 부친이 노역에서 품을 팔아 쌀 한 되를 갖고 들어오면, 양을 늘이기 위 해 보리쌀 두 되와 바꿔야 했다. 보리쌀을 삶아서 바구니에 담아놨다가 밥을 지어먹 었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마을 저수지를 막는 공사가 있었다. 勞賃(노임)으로 어른 은 1천2백원, 중학생은 6백원을 줬다. 그도 돈벌러 나갔다. 거기서 모은 돈으로 上京 비용을 삼았다.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세월의 힘일지 모르나, 되돌아보면 그 시 절이 제 인생에서 도움이 됐어요. 가난한 집안 출신은 먹고 살아남기 위해 부지런해 야 해요. 꼴을 베고 빨래하고 물 긷고 노역 하러 다니고…. 귀가할 때의 편안함, 밥먹 을 때의 고마움, 남들로부터 격려받았을 때 의 충족감을 알게 됩니다. 비록 물질은 궁 핍했지만 물질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얻 었어요.
小學(소학)을 보면, 아이를 가르치는 법으 로는 掃洗應對(소세응대:쓸고 닦고 어른 심 부름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나와요 . 이러한 기초를 해보지 못하면 인간관계에 서 소중한 것을 잃어 실패한다는 뜻이지요 . 이런 기본이 갖춰진 뒤에야 格物致知(격 물치지)도 있고 明明德(명명덕)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거죠. 궁핍한 가정환경으로 불 가피하게 저는 掃洗應對를 하지 않을 수 없 었죠. 물론 남들만큼 제때 배우지 못했다는 것은 남아요. 하지만 中卒이라고 해서 지 금의 저를 그걸로 평가하지는 않겠지요』 그는 서울행 기차 안에서 선배를 만났다. 용산역 부근에서 함께 여인숙에서 잤는데 아침에 깨어보니, 자신의 호주머니에 있는 돈이 모두 털린 사실을 알았다. 선배는 이 미 사라진 뒤였다. 그 선배를 잡느라고 이 틀간 넋이 나간 채 용산역 일대를 돌아다녔 다. 그러다가 그는 선도원에게 붙잡혔다. 차표를 끊어줄 테니 고향으로 내려가라는 것이었다.
당시 자살한 모친의 남동생, 그러니까 외삼 촌에게 연락이 닿았다. 처음에는 외삼촌이 일하는 법무사 사무실에서 사환 노릇을 하 고, 잠은 안암동 독서실에서 해결했다. 그 러면서 그는 방송통신高(고)에 등록했다. 얼마 뒤 동대문 등기소 사환으로 옮겨, 등 기 업무를 대략 익혔다. 6개월 뒤에는 법무 사 합동사무소에 사환이 아닌 사원으로 들 어갔다. 법률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고, 당 시 법원에서 뽑는 「임시 서기보」 시험에 합격했다. 1978년 성동지원으로 발령받았 다. 그뒤 강동등기소로 옮겼으나 방위 근무 때문에 그만뒀다. 밤에는 보안부대 급수장 에서 방위 근무를 하고, 낮에는 변호사 사 무실에서 일했다.
명동 私債시장
제대했을 때 나이가 스물세 살이었다. 그즈 음 변호사 사무실에서 알게 된 한 고객이 사업이 부도가 났는데 2억원만 어디 빌릴 때가 없겠느냐고 사정해왔다. 그렇게 해준 다면 수고료로 원금의 3%를 주겠다는 것이다.
『원금의 3%는 6백만원입니다. 당시 제 월 급이 30만원이었으니, 본업을 팽개치고 그 일에 매달렸어요. 변호사 사무실에 있으면 서 알음알음 안면을 익힌 고객들을 통해 2 억원을 마련해줬어요. 그분은 2억원 중 1억 3천만원으로 부도가 난 당좌수표를 막았어 요. 그런 뒤 약속한 수고료는 주지 않은 채 , 남은 돈 7천만원으로 함께 사업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그래요. 제가 명동에서 채권 장사를 하자고 제의했지요. 그렇게 해서 명 동으로 옮겨온 겁니다.
명동에는 은행과 증권회사가 다 모여 있었 죠. 당시만 해도 은행 거래를 할 때 기업주 가 회사돈을 예금해주는 代價(대가)로 은행 으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았어요. 1억원을 예 금시켜주면 은행에서 3백만원을 리베이트로 떼 줬어요. 자금력이 약한 시절이었으니까 , 돈 있는 사람이 최고였지요. 명동에서는 제도권 금융과 사채업자가 서로 결합되어 있었지요.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 금융의 중심지가 여의도로 옮겨갔어요』
─어떻게 채권 장사에 선뜻 뛰어들 마음이 들었지요.
『부동산 매매나 근저당 설정을 할 때 주택 채권을 사서 畢證(필증)은 법원에 내고, 채 권증서는 대부분 할인해 팔아요. 변호사 사 무실에서 종종 사채업자를 연결해주는 경우 가 많아요. 자연히 채권거래에 관심이 생겼 어요. 한 사채업자에게 변호사 사무실에 근 무하는 사람들을 소개시켜주는 조건으로 채 권 장사를 하는 방법을 어깨 너머로 배워뒀지요』 처음 사채업에 뛰어들 때도 그의 승부사적 인 기질이 유감없이 나타난다.
『저는 그분에게 기본급을 30만원만 달라고 했어요. 대신 월 4부(%) 이상 이익이 나면 이익의 1할을 받고, 그렇게 이익이 나지 않으면 봉급도 받지 않겠다고 했지요. 그분 은 7천만원의 자본금을 걸었지만 저는 생계 비를 걸었던 셈이지요. 국공채 장사를 했는 데 석달간 쭉 1할 이상의 이익이 생겼는데 도 제게 약속한 성과급을 주지 않았어요. 대신 월급을 5만원 올려준 데 그쳤어요. 그 분이 약속만 지켜줬다면 저는 그분의 밑에 서 아직 일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는 함께 일하던 여경리와 뛰쳐나왔다. 당 시 그의 手中(수중)에는 단돈 1백만원뿐이 었다. 5평짜리 임대사무실을 얻고 책상 4개 를 놓았다. 여경리가 자신이 저축해 놓은 돈으로 전화를 놓았다. 이 여경리는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된다. 그리고 상고 졸업생 두 명을 고용했다. 그는 자본금이 없어 어음 업자(사채놀이를 하는 사람을 지칭)에게 月 6부의 조건으로 2천만원을 빌렸다. 돈을 빌 려준 그 어음업자는 그의 사무실에서 상주 하다시피 했다.
그는 빌린 돈 2천만원으로 채권을 할인해 사서 되파는 식으로 하루 5~6차례씩 회전시 켰다. 당시 2천만원이면 3천5백60만원 상당 의 채권을 할인해 구입할 수 있었다. 채권 에 손댄 뒤 1년 만에 어음업자에게 빌린 원 금 2천만원을 다 갚을 수 있었다고 한다.
『명동 사채시장은 조직적으로 움직입니다 . 제가 직접 할인 채권을 구입하는 게 아니 라, 하부조직인 「나까마(현장수집상)」에 게 주문해요. 가령 국민주택채권, 전화채권 은 몇% 할인해 사도록 주문해요. 그날 저녁 이면 全國(전국)의 채권들이 「나까마」를 통해 명동의 채권사무실로 들어와요. 지방 에 있는 「나까마」는 우편물로 채권을 부 쳐옵니다.
그러면 명동에는 全國의 채권들이 다 모이 는 거죠. 명동에서 모인 채권은 국민주택채 권, 지하철채권, 전화채권 등 같은 종류끼 리 분류돼 다시 큰 단위로 전문업자에게 매 매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증권회사에 넘 겨집니다』
주식 바람
1984년 장영자, 김철호 사건 등 대형 금융 사고가 터지자, 은행에서 예금주들의 인출 사태가 잇따랐다. 은행마다 예금 캠페인이 벌어졌다. 이때 그는 모 거래은행으로부터 정기예금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는 당시 막 등장한 금융상품인 「양도성 예금 증서(CD)」에 착안했다. 당시까지 양도성 예금증서를 어떻게 돈으로 바꾸는지 일반 은행원들조차 잘 모르는 시절이었다고 한다.
『법원 등에서 일해서인지 제도에 대한 마 인드가 있었어요. 가령 매 회계년도마다 국 회에서 통과된 개정된 법률을 법원에서는 다루게 됩니다. 법과 제도가 곧 우리 생활 에서 나타나는 걸 보게 되는 거죠. 이처럼 금리정책이 바뀌든지 금융상품이 새로 생 기면 그 파생효과를 남보다 일찍 읽어내지요』 그는 「양도성 예금증서」라는 新(신)금융 상품을 綜金에 넘겨주면서 대금을 받아 일 단 은행에 결제해주고, 은행에서는 그 돈으 로 주택채권 50억원어치를 할인해 15억원에 구입하고, 나머지 35억원은 입금시켜 예금 실적을 달성시키는…. 그의 현란한 설명을 따라가기 어렵다. 요지는 그가 綜金, 증권 , 은행 간에 삼각 거래를 성사시킴으로써 그 수중에 1억8천만원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 당시 時價(시가)로 30평짜리 아파트 다섯 채를 구입할 수 있는 돈이었다. 채권에 손 댄 지 4년 만에 모두 5억원을 벌었다. 1986년 주식바람이 불자 그쪽에 손을 댔다 . 처음에는 주식시장에서 승부를 한 게 아 니라 상장되기 전의 주식을 사전 매매했다 . 어느 기업이 금융감독원에 上場(상장)을 신청했다는 정보를 입수해 해당 기업에 찾 아가 주식을 미리 사두고 증권회사에 곧바 로 차익을 노려 팔았다.
그러다가 직접 주식투자에 뛰어들었다. 주 식을 하다보니까 신문을 밑줄쳐가면서 읽고 책도 사봤다. 경제각료나 한국은행 총재의 스크랩을 보면 전체 경제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회사를 설립하는 방법, 上場하는 과정을 배우게 됐다고 한다.
『당시 주식에서 돈을 벌었어요. 1989년쯤 주식을 파니까 20억원이 됐어요. 3년 사이 에 15억을 번 셈이지요. 그 무렵 서초동 법 원 앞에 평당 4백만원 주고 땅을 샀는데 일 년마다 두 배씩 뛰었어요. 그래서 주식을 팔아치우고 서초동에 가서 2천만원 들여 가 건물을 짓고 개발사업을 해보려고 했어요. 하지만 돈만 2억~3억원 날리고 끝났어요. 몇년 뒤 역시 내가 살 곳은 명동이다 싶어 되돌아왔어요. 부동산에서 잃은 돈을 만회 할 겸, 주식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어요. 당 시 금리가 20%쯤 오르다가 다시 하강했어요 . 주식을 할 만한 適期(적기)라고 판단했어 요. 제가 갖고 있던 돈 20억원과 빌린돈 3 0억원, 그리고 증권회사에서 신용으로 빌린 것까지 합쳐 1백20억원을 투자했지요. 그런데 제가 산 주식들은 일년이 돼도 오르 지 않아요. 그래서 종목을 바꾸었어요. 이 번에는 제가 산 주식은 오르지 않고 제가 이미 팔았던 주식들이 올라요. 株價란 투자 타이밍이 안 맞으면 그래요. 돈을 좇아다 녀도 돈이 잡히는 게 아닙니다』
『빚 갚을 때 고맙다는 말 들어』
당시 주식 투자 결과는 파산이었다. 그때까 지 벌어놓은 재산은 물론 명동의 사채업자 에게 빌린 20억원도 빚으로 남았다. 채권자 들이 몰려들었으나 아무런 해결책이 없었다.
『처음에는 채무자가 괴롭죠. 화장실 갈 때 도 채권자가 따라다니거든요. 그런데 채무 자가 빈털터리라는 걸 알게 되면 지치게 되 고 지치면 기다리게 돼요. 그런 채권자에게 돈을 되갚으면 고맙다는 인사를 들어요. 담보도 없고 보증도 없이 저는 순전히 신용 으로 빌렸으니까. 성실하게 살았고 돈버는 능력을 인정받았으니까요. 스물네 살부터 서른 살까지 20억원을 버는 걸 봤으니까요 . 명동 채권업계에서는 「빅5」에 들어갔으니까요. 저는 채권자들을 불러놓고 「3년 안에는 꼭 갚겠다」고 선언했지만, 사실 자포자기한 상태였습니다. 그뒤 석 달 동안 술만 마시 면서 지냈으니까요. 아내에게 이혼하자고 그랬어요. 이혼한 뒤 저는 한강물에 뛰어들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아내가 저몰래 모아 놓은 돈 2억원을 내놓는 거예요. 새출발하 자면서. 그래서 다시 전환사채(CB)로 더 큰 판을 벌이게 됐어요.
증권업체에서는 약정고를 높이기 위해, 主 거래 고객에게 대출 처리를 하지 않은 채 거액을 빌려주곤 했어요. 가령 증권회사에 현금 2억원을 담보 잡히고 2만1천2백원짜 리 전환사채를 20억원어치 사놓았는데, 여 섯 달 만에 가격이 4만5천원이 됐어요. 4만 2천2백원에 꺼내다가 할인해 팔고 금리를 제하니까 18억~19억원이 떨어져요. 당시에는 증권업계의 換賣(환매) 거래를 응 용한 겁니다. 증권회사는 고객 돈으로 채권 을 사서 운용하고 채권을 팔아 주는데, 그 걸 운용해서 얼마를 벌었든간에 고객에게는 고정금리만 주거든요. 그것을 거꾸로 저는 금융기관 돈을 받아 한 거지요. 그러려면 평소에 신용도 쌓고 공을 많이 들여야지요 . 돈버는 능력도 보여줘야지요. 다시 시작 해서 불과 3개월 만에 13억원을 벌었어요』
하루 만에 65억원의 매매 差益
그는 전환사채 거래로 다시 컴백했다. 그러 는 순간 IMF 위기가 닥쳤다. 금융권에서의 대출 조건이 까다로워져, 더 이상 금융권 의 자금을 일시 활용한 채권 거래는 불가능 해졌다.
『IMF 초기에는 금리가 엄청나게 올라갔지 요. 하지만 저는 금리가 낮아질 거라는 확 신을 가졌어요. 금리가 내려가지 않으면 원 화 가치가 없어지고 결국 나라가 흔들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거꾸로 기업체에 찾아 가서 회사채를 사겠다고 나선 거죠. 기업으 로서는 단기자금 유동성의 위기를 넘기려면 할인해서라도 채권을 팔아야 되는 입장이 었어요. 저는 어느 시점까지 채권을 반드시 팔아주겠다. 만약 그 시점을 넘기면 채권 액의 두 배를 물겠다고 각서를 썼지요』 그는 회사 채권을 거의 35%나 할인해 매입 했다. 평소보다 두 배나 싼 값이었다. 이렇 게 사들인 채권을 投信社(투신사)에 되팔았 으니 그 차익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일 례로, 당시 부도설이 나돌던 신동방의 경우 회사채 3백억원어치를 팔아주기로 하고, 35% 할인해 인수 계약을 맺었다. 당시 회사 채 평균 수익률이 18.5%였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싼 가격이었다. 그가 3백억원어 치의 회사채를 사들인 가격은 2백2억원대였 다. 같은 날 그는 신동방 회사채를 국민투 신(현 현대투신)에 2백67억원에 되팔았다. 하루 만에 매매차익으로 65억원을 챙긴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1998년 한 해 동안 성신양회 , 신동방, 대상, 한솔제지 등 20여개 회사 채 1조7천억원대를 금융권에 팔아 차익을 남겼다. 국가위기였던 IMF 한 해 동안 5백 30억원을 벌었다. 이 때문에 그는 증권거래 법 위반 행위로 나중에 구속된다.
IMF 5敵? / 『가장 큰 주식투자는 증권회사 인수』
당시 그러한 채권 거래는 관행이었어요. 제도 바깥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당시 기업들은 자금 압박으로 부도가 날 판 이었습니다. 제도금융권에서는 부실여신문 제로 꼼짝달싹 못했어요. 그때 저는 알고 지내던 금융권 인사들에게 「기업이 망하면 금융권도 망한다」라며 회사채 인수를 설 득했어요. 물론 이들에게 감사 표시를 한 적은 있어요. 이 장사라서 그런 것보다 세 상사에서 도움받은 이에게 인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당시 저로 인해 기업은 단기적 인 자금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금융권 도 손해를 본 게 없었습니다. 제도적으로 하지 않는 것을 제도 바깥에서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지요.
나중에 제가 동아증권을 인수하자 저를 둘 러싼 루머가 돌았어요. 국가가 어려울 때 돈많이 벌었다고 해서 「IMF 5敵(적)」이란 말도 들었습니다. 검찰에 제보한 것은 우 리 회사에 있다가 나간 직원이 그랬습니다 . 당시 그 사실을 알고서도 저는 사사롭게 타협하지 않았어요. 보통 사람들은 위기를 맞을 때 타협에 의지합니다. 저는 시장에 서 자란 때문인지 어려움이 오면 정면돌파 를 합니다. 그게 때로는 고통이 되지만, 그 런 고통을 넘어서야 일찍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요. 타협하고 조건을 받아들이기 시작 하면 영원히 발목이 잡히고 구속이 됩니다 . 감옥 안에 앉아 저는 「명동 사채업자가 제도권으로 들어오면서 치러야 할 통과의 례」라고 받아들였어요』
당시 그와 관련해 정치권 비호설이 돌았다 . 한 일간지에서는 「중진 국회의원 모씨 등이 검찰에 선처를 부탁하는 전화를 걸어 와 담당검사가 수사의 어려움을 호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는 식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징역4년을 구형했던 담 당검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이다. 金회장은 솔직하게 조사에 응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내가 출신 지역이 호남이라서, 여러 가지 루머가 돌았어요. 하지만 내가 성취한 것 은 현 정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계 좌를 다 뒤졌어요. 물론 증권회사를 인수하 려니 워낙 제도권의 벽이 두터워 몇몇 정치 인을 소개받으려 한 것은 사실입니다. 국민 회의 돈 관리를 해줬다는 설도 있더군요. 내게 돈을 맡길 정치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 돈이 생길 일이라면 내 부탁을 들어줘도 , 내가 돈벌 일이라면 부탁을 안 들어줘요』
『가장 큰 주식투자는 증권회사 인수』
1998년 7월 부도위기에 몰려 시세 8백80원 하던 동아증권 주식을 주당 1천3백원씩 2 백10만 주(34억원)를 매입했다. 동아그룹에 서 명동 사채업자 출신인 그에게 증권회사 를 넘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그는 시세보다 비싸게 매입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분 39%를 확보해 동아증권의 경영권을 손에 쥐었다. 명동 사 채업자에서 上場社 경영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왜 증권회사를 인수하려고 마음먹었던 것 인가요.
『통상 금리가 내리면 주가가 올라요. 주식 의 시대가 될 것으로 내다봤지요. 그런데 저는 주식투자에서 실패했어요. 흐름은 알 겠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주가가 오르는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렇다고 포트폴리오(분산 투자)를 많이 할 수 없고…. 1980년대 초 양재봉 회장이 대신증권을 맡아 크게 세우 고, 김재철 회장이 한신증권을 인수해 동원 증권으로 키우는 것을 보니까…, 증권시장 이 좋아지면 증권회사가 잘된다는 결론이 나와요. 그래서 가장 큰 주식투자는 증권회 사를 인수하는 것이지요』
인수 당시 세종증권(舊동아증권)은 자본금 에서 70억원이나 잠식된 상태였다. 하지만 1년 만에 자본금 2천4백억원의 증권회사로 바뀌었다. 고객예탁금 1백80억, 고객자산 2천억원으로 증권업계 약정순위 10위로 올 라섰다. 그는 『동아증권이 설립된 1982년 부터 그때까지 총고객의 숫자가 1만8천명이 었는데, 내가 인수한 뒤로 8만명이 됐다. 일년 동안 6만명의 고객이 늘었다』고 말했 다. 주식 열풍 환경에 영향을 받은 측면이 크게 있었지만, 그의 허를 찌르는 경영 전 략도 작용했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그가 증권거래에서 우선 평가받는 대목은 「사이버거래」를 도입한 점이다. 그는 『 이미 자리잡은 증권회사와 대결하려면 뭔가 다른 전략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사이버 거래는 주식거래 수수료를 낮추었다. 그가 主고객들에게 高價(고가)의 컴퓨터 단말기 를 무료로 배급하면서까지 이를 밀고 나갔 을 때 처음에는 비웃음을 샀다. 하지만 사이버거래가 결국 대세인 것으로 판명됐다. 유수의 증권회사들이 모두 사이 버거래를 뒤따라갔다. 사이버거래는 국내 증권거래 중 50%를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콤플렉스는 세상이 던져준 話頭』
─당신은 아직도 출신의 콤플렉스가 있는가요.
『그런 類(유)의 콤플렉스에서는 벌써 벗어 났지요. 그렇지만 다른 콤플렉스는 있지요 . 누군들 콤플렉스가 없겠습니까. 콤플렉스 는 세상이 자기에게 던져준 話頭입니다. 그 것에 도전하고 해결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어요』
─이 때문에 다른 오너에 대한 열등감이 없습니까.
『기업을 물려받은 2세는 대수롭지 않게 생 각해요.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대는 창업 자입니다. 스스로 인생을 만들어낸 사람들 이지요. 그런 이들이야말로 파워가 있어요. 기존의 기업을 물려받은 기업들은 대부분 허물어질 겁니다』
그는 현재 케이블TV와 인터넷 사업에도 진 출해 있다. 때가 오면 은행까지 인수해 복 합금융그룹을 만들겠다는 야심을 슬쩍 드러 냈다. 그는 『다른 것은 몰라도 돈버는 데 는 자신 있다』라고 말하면서. 제도권을 향 한 그의 돌진이 어떤 파열음을 낼 것인가. 그는 돈버는 사람이 있으면 부러워 몸을 떨 고, 꼭 찾아가서 돈버는 법을 배웠다고 했 다. 그런데 그의 돈번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자는 오히려 따분한 기분이 됐을까. 돈버 는 게 가장 쉽다는 사내에게서 감동을 받기 위해 일부러 야심한 시각 술도 같이 마셔 보기도 했다.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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